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묜 티모셴코 (문단 편집) === 그의 몰락, [[독소전쟁]] === [[독소전쟁]] 개전 당시 티모셴코는 [[국방장관]]이었다. [[일본 제국]]에 파견되어 있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나 [[베를린]]에 파견해 두었던 소련 간첩 등 소련의 각 정보망은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계속 알려 왔으나, 스탈린은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루프트바페]] [[정찰기]]가 소련 국경을 침범한 사례가 몇백 회를 넘었는데도 스탈린은 대응 사격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티모센코와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는 소련군에 경계령을 내릴 것을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간청했으나 스탈린은 전쟁을 우려해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대비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총체적인 대비 없이 일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1941년 6월 22일 전격적으로 개시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군은 초기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동부로 퇴각해야 했다. 독소전쟁이 개전하자, 그는 중앙전선군을 맡아서 [[페도어 폰 보크]]가 지휘하는 독일 중앙집단군과 대결하였다. 겨울전쟁에 앞서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을 박살낸 게오르기 주코프도 있었으나, 그는 개전시 총참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야전 지휘에는 나서지 못했다.[* 주코프는 [[키이우|키예프]]에서 후퇴를 금지시킨 스탈린과 언쟁을 벌이다 사임한 후, [[레닌그라드 공방전]] 때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이 되어 야전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이때 그나마 독소전 초기 소련 장성들 중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평가를 받지만 워낙 대비 태세가 불충분한 데다가 독일군의 실전 경험이 뛰어났다.[* 1939년부터 불과 2년 사이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등 실전을 계속 경험했고 그 덕분에 이 당시 독일군의 전투력은 가히 유럽 최강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군은 전쟁 이전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 병력을 전진 배치시켰으며, 이 때문에 스탈린 라인 등 몇 년 간 구축한 방어 진지를 뒤로 하고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최전선에 배치된 병력 수도 독일군에게 뒤지는 상태에 있었다. 티모셴코는 답이 안 나오는 [[세묜 부됸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보로실로프의 경우엔 북부전선군을 넒은지역에 세분화해 배치한 결과 병력이 집중되지 못하고 화력이 흩어지면서 각계격파당해 결국 레닌그라드에서 독일군과 소련 인민이 강제로 접선하게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레닌그라드 공방전]] 참고.] 등 원로 장성들과는 달리 화끈하게 [[민스크]] 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강력한 편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이 민스크를 포위했고 이어진 포위전에서 병력 40만을 잃었다.[* 사실 민스크, [[스몰렌스크]], 그리고 [[키이우|키예프]]에서 일어난 이른바 3대 포위전의 실책은 퇴각을 승인하지 않은 스탈린에게 75%의 잘못이 있다는 게 정설이긴 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그렇지만 포위공격을 눈치챈 상황이라면 포위 직전 퇴로는 열려있다.] 또한 [[모스크바]] 앞을 막는 마지막 관문인 [[스몰렌스크]]에서도 군대를 싸그리 말아먹었으니...[* 그나마 이것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적절하게 병력을 빼돌려 [[모스크바 공방전]]에 병력 충원해서 다행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남서 전선에서의 포위 섬멸도 티모셴코가 남부 전선군 지휘관을 역임하였을 때 생긴 일이라,[* 키예프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 스탈린은 남서전선군의 사령관을 부됸니에서 티모셴코로 교체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의 피해 400만 중 200만에 육박하는 손실의 책임'''은 세묜 티모셴코에게 지워졌다.[* 그러나 키예프 전투 패배의 실질적 책임도 스탈린이 저질렀다. 그 무능한 부됸니조차도 기병장교였기에 독일군의 기동포위를 눈치채고 후퇴를 건의했지만 스탈린이 전부 씹었다. (부됸니가 해임된 이유도 이 후퇴건이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티모셴코와 후에 남겨진 [[미하일 키르포노스]](전투 중 전사)는 뒷수습을 하다 그만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 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이 중부집단군을 격파하면서, 주코프의 주가는 엄청 뛰었고, 그에 비해서 3대 포위전의 피해자 아닌 피해자인 티모셴코는 스탈린에게서 주코프와는 극명히 대비되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수비전으로 주코프가 티모셴코보다 유능하단 것이 증명되었다." 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비난당했다.[* 사실 이건 스탈린이 원래 잘하는 짓이다. 보로실로프 버리고, 티모셴코 버리고, 전후엔 주코프도 팽당했다. 철권통치를 위해선 군부도 자신에게 순응할 필요가 있었고, 군부에서 한명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또다시 대숙청급 피바람이 불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미리 싹을 잘라둔거에 가깝다.] 다음해인 1942년 5월,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압박과 [[하르키우|하르코프]] 탈환을 통한 [[우크라이나]] 수복 가능성의 확신으로 62만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작전술적 전차 집단들을 편성하며 이줌 돌출부에서 하르코프를 향해 반격 작전을 수행하였지만 독일군 제6군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제1기갑군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손발이 척척 맞는 플레이에 되려 공세 부대들이 돌출부가 차단되며 포위당해 '''처절하게 역관광당한다'''. --이쯤 가면 스탈린이 극도의 티모셴코 안티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사지에 몰아넣고 패배하면 욕하고--[* 사실 이 전투도 스탈린이 무리하게 춘계공세 한답시고 고위장성들 말 싹다 무시하고 무리하게 밀어붙히다 일어난 일이니 티모셴코 입장에선 억울할만 하다.] 훗날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티모셴코는 철저하게 역관광을 타서 30만의 인명 손실을 내었고, 이 손실은 후에 [[청색 작전]]에서의 소련의 방어 체계에 큰 공백이 되었다. 이때 스탈린은 티모셴코가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하자 "'''사단은 시장에서 파는 게 아니라 지원 못해 주겠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결국 판돈까지 잃고 완전히 [[시망]]한 티모셴코는 게오르기 주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 등 유능하고 젊은 장성들에게 지휘권의 바통을 넘기고 국방인민위원으로서의 군정권만 유지하며 버로우를 탔다. 참 갈수록 불쌍해지는 양반... 사실 비교 대상이 주코프, 코네프, 바실렙스키라서 그렇지 군경력이나 대조국 전쟁 발발시 짬은 투하체프스키, 블뤼헤르, 예고로프 등에 비교해야 하고, 이들에 비교해선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으니 비교적 행운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님 스탈린 본인도 일부러 사지에 몰아놓고 희생양으로 버렸다는건 알고 있어서 적어도 목숨은 붙여 놓았던 것이거나. 그래도 전투를 눈앞에 두고 [[안드레이 예료멘코]]와 교체되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하긴 했다. 그 이후엔 총사령부에서 각 전선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3차례의 포위전에서 당한 패배가 항상 따라다니다 보니 스탈린의 눈 밖에 나도 너무 나서 두 번 다시 야전 지휘를 맡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